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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02년 05-06월] 신승근 기자님의 로마 여행기 3 조회 630 작성일 2012-06-18








신승근 기자의 로마여행기를 마지막으로 연재하며, 따뜻한 가슴을 가진 그에게 감사의 뜻을 다시 한 번 전합니다. 아울러 이번 ‘로마껴안기’ 일정 중 신기자의 도움을 받은 가족들의 감사의 마음도 함께 전하며 알리탈리아 항공에서 제공한 유럽왕복항공권을 소정의 선물로 드림을 알려드립니다.











◑ 12월 20일, 목요일







목요일, 애초 일정은 중세도시 아씨시였다. 그런데 ‘원여행클럽’ 실장이 다음날 동행을 제안. ‘여행전문가와 함께 갈 수 있다면 하루쯤 미루는 것은 어렵지 않지.’ 그러나 갑작스런 공백, 로마에서 더 갈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책을 뒤적이며 장고에 돌입했다. 결국 외곽 신도시 EUR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예배와 죽음의 공간인 지하공동묘지 카따콤베를 선택. 뭇솔리니가 로마제국의 부활을 꿈꾸며 조성했다는 EUR. ‘파시스트의 멸망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더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카따콤베는 좀 달랐다. 서울출발 당시 방문 목록에 적혀있었지만 로마에서 엽기적인 얘기를 들었다. “일본인 관광객 2명이 지하묘지에서 길을 잃고 굶어 죽었다”는 것. 혼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룸메이트 박선생께 얘기를 꺼냈지만 “그곳은 왠지 기분이 안좋다”는 답을 듣고 포기했다. 하지만 로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색다른 볼거리를 갈구하던 나는 ‘카따콤베를 피하고서 어찌 로마를 알겠냐’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지도를 펼쳤다. 그곳은 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도 바울이 로마로 끌려온 아파아안티카, BC 312년에 만들어진 고대 신작로도 인근에 있었다. 1석2조였다.







오전 9시, 도심과 반대방향인 시외곽쪽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30분쯤 걸었을까. 막 갈아업은 듯한 드넓은 밭과 소나무 숲. 목초지가 나타났다. 평화로운 목가적 풍경, 마음이 훨씬 느긋해졌다. 전원 풍경을 벗삼아 10여분, 칼리스토 카따콤베에 도착, 매표소는 아직 개시전이었다. 30여분을 더 기다려 입장권을 샀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안전상 지하묘 출입은 안내인이 필수. 이른 아침, 한국인은 나 하나였다. 중국인, 일본인…. 같은 피부색의 동양인들이 10여명씩 무리지어 들어가는데…. 문앞에서 처량하게 다른 한국인 관광객이 모이기를 기다렸다. 감감무소식,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색한 기다림이 한동안 지속됐다. 결국 “영어 설명이면 충분하다”며 프랑스 관광객들과 동행을 자청했다. 하지만 나이 지긋한 관리소 직원은 “코리안? 노”라 외쳤다. “어쭈, 인종차별까지….” 본능적인 방어심리가 발동했다. 그런데 잠시 후 뜻밖의 환대가 이어졌다.







“안녕하세요.” 30대 초반의 이탈리아 안내인의 입에서 한국어가 튀어 나왔다. 목에는 큼직한 녹음기를 하나 걸고 있었다. ‘뭘 하려는 것이지?’ 쭈뼛거리며 뒤를 따랐다. 녹음기 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한국말이 흘렀다. “이 곳 산 칼리스토 카따콤베를 찾아주신 여러분….” 전형적인 신부님 억양이었다. 이 후 30분 동안 한국어 녹음설명과 안내인의 영어 현장 설명이 보태졌다. 화산암반 지대를 거꾸로 파고들며 미로처럼 형성된 공동묘지는 지상과 격리된 해방공간이었다. 처음에는 음습함이 느껴졌다. 한마디, 한마디 설명이 보태질때마다 2천년 전 이 어둠속에서 오로지 신과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고단한 삶을 버텨냈을 기독교인들의 삶이 떠올랐다. 나는 무신론자이지만 이들의 신념만은 인정했다.







다시 밝은 세상, 나는 그동안 로마시내 박물관 곳곳에서 마주친 오만한 로마인은 잊기로 했다. 단 한 사람의 관광객을 위해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는 안내인의 진지한 모습을 보며 ‘나 또한 이들에게 너무 성급한 편견을 갖고 있는게 아닌지’ 자문했다. 물론 한국 카톨릭 신자들의 마당발 신화도 새삼 실감했다. 한국어 녹음과 카따콤베 입구 서점 한켠을 가득 채운 한글판 종교서적은 이것을 웅변하고 있었다. 카따콤베 주변 공간은 싱그러움 자체였다. 드넓은 목초지대를 가로지르며 실삼나무 가로수 우거진 흙길이 이어졌다. 상큼한 평화. 나는 평원을 걸었다. 발밑 지하세계는 모두 고대 기독교인들의 삶과 죽음, 종교적 신념이 교차한 공동묘지였다.







오후 로마 외곽 신도시 EUR. 전철역 역사부터 로마 중심부와는 확연히 달랐다. 비좁고 어둡고 우중충한 분위기, 스프레이 낙서 투성이 전철역은 없었다. 현대적 분위기, 깨끗하고 드넓은 플랫폼, 무료 화장실까지…. 전동차 안에서는 아코디언으로 캐럴송을 연주한 뒤 코카콜라 종이컵을 들이미는 남자들, 들보에 젖먹이를 감싸안고 ‘세뇨라, 세뇨리타”를 외치는 여인내들이 심심찮게 목격됐다. 우리 지하철에선 흔한 풍경. 로마시민은 어떻게 대처할까 유심히 지켜봤다. 젊은이들은 애써 눈을 감고 희끗희끗한 노인들은 몇 개의 동전을 적선했다. 동서고금을 떠나 사람사는 곳,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EUR 도심은 로마보다 서울에 가까웠다. 건물이 좀 더 웅장하고 드넓은 공원과 쭉쭉 뻗은 대로가 차이랄까? 로마 중심가에서 유료 화장실조차 찾기 어려워 애를 먹었던 나는 EUR에서 훨씬 편안함을 느꼈다. 음식점도 전혀 다른 분위기. 테이블에 신문철을 비치해놓고, ‘자릿세’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로마 도착 이후 처음으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온화한 마음으로 점심을 먹었다. 사실 로마 곳곳을 발로 뛰는 나에게 식당은 껄끄럽고 어색한 공간이었다. 혼자 들어가 뭔가를 먹는다는 것부터 멋쩍고 쑥스러운데…. 콧구멍만한 식당조차 자리에 앉는 순간 음식값에 버금가는 자릿세와 봉사료가 추가되는 이들때문에 첨병쯤으로 혐오하던 맥도널드 햄버거나 곳곳에 널린 중국집, 아니면 길거리 노점에서 샌드위치 한조각을 사먹는 게 고작이었다. 저녁식사는 아예 호텔에서 미지근한 샤워물에 잔뜩 부풀린 컵라면과 햇반으로 떼웠다. 팔팔끓는 물이 안나온다는게 좀 불만이었지만, 이것이 훨씬 편안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다. 덕분에 10박 11일 동안 몸무게가 3kg나 줄었으니, 뭐 꼭 애석해할 일만도 아니다.































◑ 12월 21일, 금요일







일정이 다시 조정됐다. 서실장이 이탈리아 안의 독립소국 산마리노 공화국행을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또 갈등, 하지만 아드리아해를 끼고도는 열차와 오는 길에 아씨시까지 볼 수 있다는 설명에 솔깃했다. 일정은 빡빡했지만 하나라도 더 본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보혜네 세 식구가 이번에도 동참했다.







9시 37분 테르미니 출발 열차를 타야만했다.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섰다. 하지만 뜻밖에 출근체증이 닥쳤다. 결국 기차는 떠난 뒤었다. 다음 열차는 11시 37분, 산마리노 도착 예정시간은 오후 4시쯤. 이미 어둑할텐데…. 무의미했다. 애초 계획대로 프란체스코 수도원이 있는 아씨시로 방향을 긴급수정. 대신 프로축구 선수 안정환이 뛰고 있는 페루자를 곁다리로 배치했다.







아씨시 여행의 묘미는 간선 열차 갈아타기. 안코나행 열차에 몸을 싣고 폴리뇨역에서 페루자행 열차로 갈아탄 뒤 중도에 내려야 했다. 나폴리 여행 때 알았지만 이탈리아 기차는 정차역 안내방송도 거의 없다. 별 설명없이 20~30분 늦는 것은 기본이었다. 깍듯이 영어와 일어, 중국어 안내방송을 하고, 칼같이 도착시간을 지키는 우리 열차와는 사뭇 달랐다. 그러나 안달나는 쪽은 초행길인 우리들뿐, 로마인은 무사태평이었다. 여유인지, 체념인지, 아니면 초탈인지 알길은 없지만….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는게 순리. 나도 체념할 수 밖에 없었다.







일행 중 누군가 졸지않고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간선열차도 재빨리 갈아타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 하지만 이것만 성공하면 열차이용법 완전정복이었다. 유럽 어느 곳이든 자신있게 오갈 수 있을 것같은 야무진 생각이 들었다.







안코나행에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번에도 문제가 생겼다. 급행인 유로스타는 모두 지정좌석제. 분명 금연석을 끊었건만, 배정된 자리는 담배연기 자욱한 흡연칸. 일행 여러명을 한곳에 몰아주다보니 그랬을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신경써봐야 내 가슴만 멍들텐데 뭐. 문제는 이혜민, 이보혜 두 아이들. 서실장이 “금연칸으로 가자”고 말했다. 부탁하면 통한다는 것. 개인주의자인 이들에게 과연 먹혀들까? 하지만 여행업계 ‘고수’가 말하는데 따라가는 수 밖에.







한 중년 남자에게 사정을 말했지만, 보기좋게 거절당했다. 무작정 빈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 곧 몇명의 젊은 여성들이 다가왔다. 본능적으로 좌석주인임을 알아채고 긴장했다. 하지만 그들은 기꺼이 흡연칸으로 옮겨갔다. 한 여성은 아예 열차 연결통로에서 책을 읽으며 버텼다. 금연자인 그녀 또한 담배연기를 견디기 어려웠던 것. 민망한 우리에게 “아이가 먼저니 부담갖지 말라”고 말했다. 역시 사람사는 곳. 풋풋한 인정이 넘쳐났다.







우왕좌왕, 페루자행 열차로 갈아타고 얼마를 달렸을까. 흰눈 덮인 높은 산 중턱에 자리한 아름다운 마을이 차창에 들어왔다. 목적지 아씨시였다.







상쾌한 공기, 삼나무 우거진 높은 산, 흰 눈, 자연석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중세식 건물, 미로같은 골목길…. 나는 곧 이 작은 산골 마을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꼭 다시 찾아와 몇 일 쉬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솟아났다. 미로같은 좁은 골목을 따라 정상으로 오르자 다시 한 번 입이 벌어졌다. 중세 영주가 머물렀을 성곽. 뒤쪽은 가파른 절벽, 앞쪽은 드넓은 평야지대가 10km이상 시원스레 펼쳐졌다. 영주는 수 백년동안 저 평원을 다스렸고, 농노들은 고단한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방인의 눈에는 축복의 땅일 뿐, 중세 분위기를 마음껏 호흡하며 경쾌하게 골목을 헤집고 다녔다.







땅거미가 뉘엇뉘엇 내려앉을 무렵, 아씨시 명성을 드높여준 프란체스코 수도원을 찾았다. 경건함과 엄숙함, 번뜩 두 단어가 떠올랐다. 바티칸이나 베드로 성당, 로마 곳곳에 마주친 수많은 성당은 웅장함과 화려함으로 나를 압도했다. 그러나 형형색색의 대리석 기둥과 금빛 찬란한 장식물, 모자이크 창을 통해 엄숙과 경건을 절감하기는 어려웠다. 끊임없이 오가는 관광객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낡은 황토색 내벽과 그 위를 수놓은 조토의 흐릿한 벽화들이 어울러진 프란체스코 수도원은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1층 본당에서 지하로 자리한 프란체스코 무덤 앞에 다다르자 “신의 섭리를 깨닫기 위한 수도행위 말고 도대체 무슨 잡념이 끼어들 수 있겠냐”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뛰어난 건축술에 감탄했다. 아씨시는 끝까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오후 6시 25분, 페루자행 마지막 버스가 있다는 매표 상점 주인의 말을 믿고 표를 샀다. 다른 곳에도 한번 더 확인했다. 모두 차가 있다는 것. 버스시간표까지 보여줬다. 어둠이 짙게 깔린 광장에서 비상식량인 햄, 스팸으로 허기를 달래며 한시간을 넘게 기다렸건만, 온다는 버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렇게 황당할 수가.” 순간 우리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얼마를 더 기다렸을까. 드디어 마지막 한대가 어둠을 가르며 나타났다. 그런데 웬일인가. 마을 아래 아씨시역까지 내려가는 마지막 버스였다. 버스 기사 왈, “페루자행 버스는 이미 5시 10분에 떠났다”는 것 아닌가.







“정말 웃기는 사람들이네”, “어떻게 표파는 사람이 막차 시간도 몰라. 좀 더 늦게 알았다면 이곳에서 발이 묶일뻔 했잖아.”…. 누구랄 것도 없었다. 우리 일행은 한마디씩 내뱉었다. 상점주인에게 환불을 요구했다. 그런데 아주 태연하게 “당신들이 없을 때 차가 떠났다.”고 둘러댔다. 속이 끓었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버스 기사가 차가 없다고 하더라”며 닥달한 뒤에야 겨우 돈을 돌려받았다. 능청스러움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곧 마음이 풀렸다. 우리 설명을 들은 아씨시역 직원은 페루자까지 무임승차를 허용했다. 한쪽은 웃으며 등을 치고, 다른 한쪽은 친절하게 보상하고…. 이런게 이탈리아식은 아닐까? 예측못한 돌출변수들은 자유여행의 묘미를 한껏 드높였다. 좌충우돌, 황당무계한 경험들…. 시간이 흐른 뒤에 아련한 추억이 된다.































◑ 12월 22일, 토요일







어느덧 로마의 마지막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른 여행객들은 일찌감치 버스를 대절해 나폴리로 떠났다. 나홀로 로마 공화정때부터 휴양지로 명성을 누려온 티볼리를 찾았다. 로마 동쪽 30km지점, 버스로 30분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자그마치 2시간. 주말을 맞아 교외로 빠져나가는 행락차량 틈에 끼인 것이다.







어렵사리 도착한 티볼리의 현실은 그 명성만 못했다. 마을 뒷편은 황폐한 민둥산, 도시 곳곳은 공사중이었다. 중세풍의 낡은 집들이 없다면 대한민국 어느 소도시나 크게 다를바 없었다. 로마에서 눈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던 수퍼마켓들과 마을 광장 근처에 자리한 에스테빌라가 그나마 내 노고를 보상해줬다.







슈퍼에는 값싼 먹거리들이 널려 있었다. 큼직한 롤빵과 콜라로 충분히 배를 채우는데 겨우 2천리라. 로마 중심가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가격파괴였다. 에스테빌라는 대문 밖 속세와 완벽하게 격리된 별천지였다. 이끼가 덕지덕지 올라앉은 수백개의 분수가 일제히 물을 뿜고, 5백년은 족히 됐음직한 아름드리 향나무들이 치렁치렁 가지를 드리운 숲속 연못위로 새들이 떼지어 날았다. 보르자 가문의 수백년 영화를 증거하는 정원, 그곳에서 무릉도원을 봤다고 말한다면, 너무 과장된 것일까?







오후 4시 로마로 돌아온 나는 무작정 도심을 거닐었다. 포폴로 광장, 코로소 거리, 유대인 케토지역, 테레베 강변…. 지난 열흘을 추억하듯 발길 닿는대로 몸을 옮겼다. 이제 원하는 곳은 어디든 찾아갈 수 있었다. 오후 늦게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로마시민들 틈에 끼어 골목을 누비며, 야무진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내가 이들보다 로마를 더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로마의 마지막 밤은 또 이렇게 저물었다.































◑ 12월 23일, 일요일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 모든 여행객들이 아침부터 부산하게 움직였다. 나는 아침 일찍 벼룩시장에 들러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몇가지 소품을 챙긴 뒤 공항행 버스에 올랐다.







‘로마의 열흘’이 머릿속을 자꾸 맴돌았다.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지난 열흘간 행적을 충실히 기록한 수첩을 꺼내들었다. 정말, 무척, 화려한, 거대한…. 초반 5일동안은 이런 부사와 형용사들이 자주 등장했다. 뒤로 갈수록 자유, 현실, 망각이라는 명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 여행을 통해 얻은 것은 아름다운 추억과 자유였고, 잃은 것은 고단하고 퍽퍽한 일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인천공항 도착.로마껴안기에 동참한 다른 여행객들과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돌아서자 다시 현실이었다. 아내와 어린 딸, 신문사….







집으로 돌아온 나는 너덜너덜한 로마지도를 정성스레 한 쪽 벽에 붙였다. 로마의 자유를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다시 짐을 꾸려 떠날 그날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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