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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02년 03-04월] 신승근 기자님의 로마 여행기 2 조회 727 작성일 2012-06-18






신승근 기자는 한겨레신문 정치부 기자로 근무하고 있으며 험악한 정치판을 취재하는 사람답지 않게 따뜻한 인간적 매력이 물씬한 그의 기사는 한겨례 21을 통해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지난 호에 이어서 ‘로마 껴안기’ 백일장의 당선작인 그의 글을 연재합니다.





◑ 12월 16일, 일요일.

로마에서 이틀밤을 보낸 여행객들은 이미 상당한 지혜를 터득한 듯했다. 아침 식탁은 정보교환소였다. 일정을 맞추며 팀이 결성됐다. 일요일이라. 성당과 로마인의 생활상을 느낄 수있는 코스가 적격일 듯 싶었다. 로마 남서쪽을 종단하며 벼룩시장과 로마민속박물관, 캄포데피오리 꽃시장, 식료품점을 둘러보자. 몇몇 가족이 또 동행을 요청했다. 갈등했다. 아줌마 셋, 아이 여섯, 나까지 또 10명. ‘따라오기 힘들텐데요?’완곡히 거절. 하지만 ‘걷는 데 이골이 났다’는 답변에 도리가 없었다. 대신 목적지에 도착하면 흩어졌다 약속된 시간에 다시 모이는 이합집산 방식을 제안했다.

첫 목적지는 테레베강 하류에 위치한 벼룩시장 포르타 포르테제. 일요일만 장이 서는 이곳은 남대문과 황학동을 뒤섞어 놓은 듯했다. 1만리라, 우리돈 6천원짜리 가죽 가방이 널렸고 3만리라면 가죽점퍼도 살수 있었다. 프라다, 피에르가르댕 등 유명상표가 붙은 ‘짜가’핸드백, 몇 km씩 늘어선 노점과 자동차 위에 올라 손님을 끄는 상인의 모습까지…. 너무 닮음꼴이다. 황학동과 인사동 거리를 자주 떠돌던 나는 골동품 노점쪽에 눈길이 쏠렸다. 하지만 상당수 골동품은 억지로 녹을 내고 때를 입힌 흔적이 역력했다. 메이드 인 차이나, 인디아도 적지 않았다. ‘외관 뿐 아니라, 내용까지 인사동과 황학동을 꼭 빼닮았네!’ 물론 티셔츠, 모자, 식탁보 등 그럴듯한 기념품을 중심가의 절반 가격, 단돈 5천리라에 살 수 있는 매력도 숨어있었다.

골목을 돌고 돌아 찾아간 로마민속박물관. 300~400년전 로마인의 생활상을 담은 풍속화와 옛 주점, 약국의 모습을 재현한 인형 몇점이 전부였다. 요금은 1만리라. ‘이런 도둑놈들. 우리 민속박물관 한번 가봐라. 얼마나 잘해놨는지.’ 말은 못했지만 무척 속이 쓰렸다. 하지만 이날 오후 마주친 로마 거리 풍경에 생각을 바꿨다. 옛 로마제국의 영화를 증거하는 성터 포룸, 건국신화의 발상지 팔라티노 언덕, 검투사와 초기 기독교인들의 생사가 엇갈렸던 콜로세움, 캄피돌리오 광장, 스페인 광장, 뜨레비 분수…. 길게는 2천여년,최소 3백년은 족히 넘은 그 많은 유적이 도처에 널렸는데 특별히 조상의 생활상을 재현한 민속촌이 필요할까. 2천년전 도읍지를 맨발로 돌아들다 문득 ‘대제국의 영화가 덧없이 흘렀건만, 로마인들은 아직 그 제국의 피땀에 기대어 살고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내 눈에 비친 로마의 현실이었다.









이날 수많은 성당을 드나들었다. 아이들에게 적절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 ‘마음을 곱게 쓰면 보답이 있는 법.’휴식은 성당을 좀더 깊이 볼 기회를 줬다. 거대한 성당에 불과 몇십명이 모였지만 자못 진지했다. 관광객과 걸인, 외부인에게도 개방적이었다. 그들의 내면을 속속들이 들여다 볼수는 없지만, 교세 확장과 기복신앙이 지상최대의 목표가 된 우리내 종교와 뭔가 다른 것 같았다. 이날 밤 침대 머리맡에서 박개언 선생님도 비슷한 말을 꺼냈다. “헌금 상자가 도는데, 모두 동전 몇푼 내더라고. 그런데 아무런 어색함도 없고 눈치주는 일도 없어. 확실히 달라.” 무슨 차이일까? 이들은 수천년 동안 천상의 권력이 인간 세상을 지배했고, 마녀사냥과 과학적 발견의 결과마저 부정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그 오랜동안 수많은 과오가 점철되면서 종교가 나름의 일상으로 정착했을 것이다.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과오를 저질러야 할까.’이런 저런 단상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 12월 17일, 월요일.

나폴리행을 결심했다. 가족 여행객을 위해 몇일 뒤 버스투어가 계획돼 있었다. 갈등했지만, 직접 기차표 끊고 이탈리아인들의 일상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버스투어에 앞서 취재가 필요하다며 임학현 기자가 동행을 자청했다.

호텔방에서 여행안내서를 펼쳐놓고 다시 한번 기차 이용법을 숙지했다. ‘영어는 잘 통할까?’ 헛된 걱정이었다. 역에 설치된 자동 발권기의 영어 설명에 따라 직원과 한마디 대화 없이 표를 손에 쥐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은 여전히 찜찜했다. 안내책자에는 ‘좌석 예약 필수! 어기면 벌금’이라 씌여있었다. 그런데 표에 좌석번호가 없는 게 아닌가. 인포메이션센터에 다가가 물었다. 그러나 “플랫폼으로 나가라”는 말 뿐. 무작정 객차에 올랐다. 어색함과 불안감이 스쳤다. 파랗고 노란 눈동자들이 온통 나를 향한 것 같았다. 곧 문제가 생겼다. 검표하던 차장이 이탈리아어로 뭐라 떠들었다. 눈치를 살피던 우리는 몇몇 현지인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2등좌석 표를 산 우리가 1등석에 앉았던 게 말썽이었다. 얼마후 다른 차장이 나타났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또한 우리를 질책했다. 다행이 영어. 플랫폼 앞쪽에 설치된 노란색 개찰기로 승차시간을 표기하는 일을 빼먹었다는 것이다. “미안하다”며 몇차례 고개를 숙여 위기를 넘겼다.











4시간쯤 내달렸을까. 형형색색 팬티와 속옷이 나풀거리는 진풍경이 하나둘 시야에 들어왔다. 순간 나폴리에 근접했음을 알아챘다. 책을 통해 나폴리 풍경 1호는 건물 베란다 마다 널린 빨래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역에 내리자 낙담했다. ‘세계 최대의 미항’이라 마르고 닳도록 배웠는데. 고층빌딩과 아파트, 어수선하고 너저분한 거리 풍경, 크락션 소음과 얼굴을 붉힌채 언쟁하는 운전자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거 완전 꽝이네.” 임 기자도 “일진이 안좋은데요. 피자가 유명하다니 허기나 떼우며 다음을 생각하죠?”라고 말했다. 그나마 화덕에서 갓 구워낸 값싼 피자가 실망한 가슴을 달랬다. 얇고 좀 딱딱한 밀가루 판에 몇가지 소스를 가볍게 얹은 게 한국식 피자와 좀 달랐다. 허름한 2층 다락방의 테이블, 콜라 한 잔. 피자는 혓속 깊이 감미롭게 녹아들었다. 5천리라, 우리돈 3천원짜리 피자가 정말 기막힌 맛이었는지, 아니면 본고장 피자를 맛본다는 만족감이 미각을 오작동시킨 것인지….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불운은 몇시간 더 지속됐다. 찬바람 무릅쓰고 찾아간 국립고고학박물관. 포크레인 굉음과 흙덩이가 뒤엉킨 입구부터 불길했다. 내부도 한바탕 공사중. 검투사들의 철갑 투구와 헤라클레스 조각상 등을 보며 겨우 불만을 잠재웠다. 그런데, 사진촬영 협조를 얻으려던 임 기자가 박물관에 감금당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우울했다. 얼마 뒤 나폴리 거리에서 서로를 잃는 사태까지 겹쳤다.

‘괜히 왔나봐.’ 후회하며 홀로 거리를 떠돌던 나는 갑자기 동공이 확대되는 느낌을 받았다. 빨래가 빼곡히 걸린 좁은 골목길, 그 틈새로 언덕 높이 중세 성곽이 들어왔다. 이제 좀 나폴리 향기가 묻어났다. 골목을 따라 성곽까지 오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동양인 관광객만 노리는 치기배에 관한 흉흉한 소문을 떠올리며 욕구를 억눌렀다. 대신 경찰들이 배치된 비교적 넓은 골목을 활보했다.









나폴리 도착 4시간, 드디어 나폴리항. 폼페이를 삼킨 베수비오 화산과 카프리 섬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말 아름답다!” 나폴리 왕궁과 플레시비트 광장을 거쳐 바닷가에 다다르자 절로 감탄사가 터졌다. 방파제에 기대섰다. 수첩을 꺼내들고 서툰 솜씨로 주변 풍경을 그려갔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난 이제 겨우 시작인데….” 집시와 걸인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왕궁과 산카를로 가극장, 화려한 움베르토 갤러리아 외벽 기둥은 어느새 노숙자들이 점령했다. 때탄 누더기 천조각도 하나둘 깔렸다. 서울역 어데쯤 온듯한 익숙한 풍경. 심한 신체적 상해만 입지 않는다면 좀 황당한 일을 당해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은 당돌한 생각이 앞섰다. 로마도착 4일째, 이제 서서히 일상에 적응하고 있었다.

폐장시간이 임박한 누오보성에 기어코 들어갔다. 지오토가 설계했다는 거미줄 형태의 독특한 돔 성당과 항구의 밤 풍경을 보고 싶었다. 사실 화장실이 더 급했다. 모든 게 황홀했지만, 진땀나는 경험도 겹쳤다. 성안 출구의 전등이 하나둘 꺼졌다. 결국 길을 잃고 복도 한 귀퉁이에 갇혔다. ‘과욕을 부리면 안되는데….’ 주먹으로 문을 내리치며 목놓아 “헬프미”를 외쳤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한쪽 귀퉁이에서 희미한 불빛이 느껴졌다. ‘정말 웃기는 짜장이네, 이것도 이탈리아식인가? 한 판 붙어봐!’ 하지만 내발은 바깥으로 줄행랑치고 있었다.









한숨돌린 나는 서둘러 중앙역으로 향했다. 나폴리 최대 번화가 ‘코르소 움베르토’가 지름길이었다. 고풍스런 대리석 건축물과 첨단의 패션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사로잡은 것은 강렬한 흑백의 대비였다. 길거리는 검은 털모자와 점퍼를 둘러쓴 채 빠꼼히 흰 눈동자를 굴리는 흑인들 차지였다. 조잡한 악세사리와 가죽 제품을 늘어놓은 노점상들. 화려한 조명등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건물안 점포는 모두 백인들 몫. 도대체 세상 어디서 이런 인종차별의 현장을 목격한단 말인가.

오후 7시, 중앙역 광장. 졸고있는 짐꾼들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길 쯤 임 기자가 나타났다. ‘치기배를 만나 값비싼 카메라 렌즈를 깨먹었다’며 한참 넋두리했다. 로마 귀환 열차속. 또 다른 배낭여행객을 만나자 자연스레 여행괴담이 오갔다. 26살 여성 배낭여행객의 경험은 경악스러웠다. 스페인 라스팔마스, 벌건 대낮에 대로에서 둔기로 머리를 맞고 실신한 뒤 몽창 털렸다는 것. “여러 명이 다가와 둘러싸고 구석으로 몰더니, 뭔가로 내리치는데….” 눈물까지 글썽였다. 자국민 보호 의무가 있는 해외공관은 뭘했을까. “목격자까지 있는데 스페인 경찰은 단순절도로 몰고. 영사관요, 전화했지만 연결이 안됐어요. 별 도움도 안된다던 데요. 무작정 치떨리는 곳에서 빠져나왔어요.” ‘이 여인 용기가 가상한 것인지, 무모한 것인지. 또 외교관 나리들은 그 먼곳에서 왜 혈세를 낭비하고 계신지.’ 나폴리 여행은 좌충우돌, 뒤죽박죽이었다. 하지만 끝내 오르지 못한 좁은 골목길이 계속 아른거렸다.











◑ 12월 18일, 화요일.

룸메이트 박개언 선생이 발견했다는 할인서점이 아침부터 나를 유혹했다. 이탈리아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림책 좀 사오라는 아내의 특별주문을 받고 몇군데 서점을 들렸지만, 그 때마다 고개를 흔들었다. 책값이 장난이 아니었다. 영문서적은 국내 가격의 두 배 이상. 하지만 로마의 대표 백화점인 라니나센터 앞 지하도에 자리한 할인점은 색달랐다. ‘SCONT 50%’라는 라벨이 눈에 들어왔다. 1만 5천리라, 우리돈 9천원이면 3백쪽 안팎의 괜찮은 책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첫 날 그럴듯한 그림책을 몇 권 건진 뒤, 틈날때마다 이 곳을 드나들었다. 거대한 건축물 감상과는 또다른 재미를 안겨줬다. 마치 보물창고를 뒤지는 기분이었다. 유명 화가의 작품집과 뒤섞여 있는 각국의 춘화집을 들출때는 짜릿한 스릴마저 느껴졌다. 쇼핑에 잼뱅이인 나는 이후 ‘SCONT’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할인’을 뜻했기 때문. 곧 15권의 책과 로마를 뒤져 발견한 값싼 기념품들이 여행가방을 가득채웠다. 하지만 전체 가격은 10만리라, 우리돈 6만원을 채 넘지 않았고, 마음은 그 이상 풍성했다.











로마 여행 중반기, 박물관 기행을 본격화했다. 먼저 로마국립박물관 본원과 5개 분원들을 섭렵했다. 특히 나보나 광장과 인접한 팔라조알템프스는 고전 조각품을 일목요연하게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크기나 모양, 형태를 조금씩 달리하는 헤라 여신 두상 등을 바라보면 동일한 소재를 시대별로 어떻게 형상화했는지 미묘한 차이가 느껴진다. 국립박물관 본원은 그리스, 로마시대 걸작 조각품을 발굴 당시 파손된 원형 그대로 전시하는 곳으로 정평이 나있다. 고전 미술의 세계적 보고하는 칭송도 붙었다. 그러나 심미안이 부족한 탓일까, 파손 부분까지 복원한 다른 박물관 전시품과 견줄때 괜히 어수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본원 3층, 고대 로마 저택 내부를 장식했던 벽화들과 방대한 모자이크 작품만으로 대가는 충분했다. 나는 수많은 성당과 박물관, 유적지를 드나들며 로마인의 오만함에 혀를 내둘렀다. 수백만의 관광객이 찾는 도시에는 영문표기조차 왜그리 인색한지. 온통 이탈리아식 표기뿐. 하지만 이 곳 3층만은 예외였다. 매력적인 로마 여성이 충실한 영어설명과 안내를 곁들였다. 뜻밖의 친절, 축복받은 이들에게조차 희귀한 3층의 유물을 몰지각한 관광객들로부터 지키려는 의도라는 것을 알지만 이탈리아어를 통해 유물의 의미를 어렴풋이 추론하는 데 지친 나에게는 어쨌튼 단비와 같았다. 지하층의 동전박물관도 흥미를 더한다. 기원전 제작된 동전부터 2002년 출범할 유로화까지, 수만점의 화폐가 시대와 주제, 등장 인물별로 빼곡히 진열된 공간을 바라보면서 로마인의 기괴한 수집벽에 전율마저 느꼈다. 금은 세공품도 볼거리. 특히 금반지와 금귀걸이는 신라시대 그것과 너무 흡사하다.

이제 로마의 일상에 제법 익숙해진 나는 한밤중까지 로마 거리를 무작정 활보했다. 버스나 지하철 개찰기가 작동하지 않을때면, 오히려 무임승차에 따른 경제적 이득에 쾌감을 느꼈다. 로마인 다수가 무임승차하는 광경에 익숙해진 탓일까? 첫 날 버스승차때 경험한 어색함은 더이상 없었다. 그리고 소비심리를 충동질하는 첨단의 상품진열대 앞을 자주 스치면서, 나도 모르게 쇼핑에 대한 생태적 거부감까지 완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12월 19일, 수요일.

여느 때처럼 새벽 5시에 몸을 일으켜, 일정을 조정하는 나는 뭔가 홀긴 기분이었다. 로마 도착 이후 줄곳 메모수첩에 12월을 7월로 표기하고 있었다. ‘시차 때문일까?’ 강행군에 부르튼 입술에서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이때쯤. 휴식이 필요했다. 그러나 귀중한 시간을 조금도 허비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짓눌렀다. 결국 호텔을 나서는 시간을 좀 늦추고 박 선생님께 영양크림을 얻어 바르는 정도로 응급조치를 끝냈다.

사람의 마음은 흐르는 구름처럼 변화무쌍하고 때로는 간사해지는 법. 처음 발을 디딜때 그토록 웅장하고 매혹적이던 로마의 고풍스런 풍경이 왠지 우중충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직 5일이나 남았는데…. 고대 유적과 대리석 조각 중심의 로마에 벌써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한참 궁리끝에 유화가 집대성 된 도리아팜필리갤러리와 악기박물관, 현대식 로마를 느낄 수 있는 베네토 거리 등 이색볼거리를 찾아냈다.











오전 10시 30분, 로마 구시가를 감싼 성벽의 동남쪽 외진 곳에 자리한 악기박물관은 썰렁했다. 내가 첫 방문객인듯. 이곳에 머문 2시간 동안 다른 관람객도 없었다. 입장료는 4천리라. 직원이 10여명. ‘도대체 이들은 어떻게 수지타산을 맞출까?’ 문득 이 런 생각이 스쳤다. 박물관을 드나들때마다 비슷한 상황에 직면했고, 똑같은 의문을 품었다. 그러나 끝내 해답은 못찾았다. 다만 ‘조상을 잘 둔 덕에 도시 곳곳을 떠도는 수백만명의 관광객들이 어디선가 돈을 떨굴테고, 그것을 재배분할 것’이하 추론할 뿐이었다.

사실 내가 걱정할 일도 아니었다. 박물관 직원들은 모두 태평했다. 관람객은 아랑곳 않고 자기들끼리 수다스레 떠들거나, 거침없이 핸드폰 통화에 열중했다. ‘월드컵을 앞두고 전국민에게 더 극진한 질서와 친절을 강요하는 우리가 혹시 비정상은 아닐까?’ 이런 의문을 억제할 수 없었다.











어쨋든 악기박물관은 이색적인 볼거리를 제공했다. 이탈리아 고유악기는 물론, 이집트와 그리스, 심지어 일본의 사미센까지, 동서양의 악기 3천여점은 음악에 문외한인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애석하지만 가야금이나 거문고는 없었다. 특히 피아노, 파이프오르간, 하프, 기타 등 익숙한 악기가 어떤 과정을 거치며 조금씩 개량됐는지 직접 확인하며, ‘뭔가 한 수 배웠다’는 만족감을 느꼈다.

흐믓한 마음에 발걸음도 가벼웠다. 공원 벤치에서 홀로 누워 해바라기도 하고, 현대적 세련미가 느껴지는 베네토 걸리와 트라얀 시장 등 고대 유적이 밀집한 포름 동쪽 측면을 오가며 수천년 시차도 맘껏 호흡했다. 40m 높이의 거대한 트라얀 기둥에 넋이 팔려 있을 때, 누군가 “알로하”라 외쳤다. ‘하와이안처럼 보이나? 왠 알로하?’ 흑인 노점상이 친절한 미소와 샌드위치, 온갖 음료로 허기진 배를 유혹하고 있었다. 성큼 다가가 덥썩 집어들고 꿀꺽. 그런데 왠 날벼락. 조막만한 샌드위치 하나에 6천리라. 1천리라짜리 생수 한 통은 3천리라. 미소 뒤에 숨은 바가지였다.

해질 무렵, 도리아팜필리갤러리를 찾았다. 인물화, 풍경화, 성화 등 이탈리아의 회화작품이 집대성되어 있었다. 규모는 압도적, 눈을 사로잡는 작품은 없었다. 발라스켓이 그린 교황이노첸트 10세의 초상화 등 명성이 자자한 몇작품에 몰입하려 했지만 큰 감동은 없었다. 더욱이 좁은 공간에 너무 많은 작품을 전시하다보니, 상당수 작품이 조명불빛을 그대로 반사시키는 부적합한 위치에 걸려있었다.











이 날 저녁 박개언 선생님은 “조상들의 조각 실력에 비하면 후손의 회화는 형편없다”고 조언했다. 전문화가인 박 선생님의 평가에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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